발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의 관광지로, 국내에도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져있다.
발리 섬 전체의 크기는 제주도의 3배 정도이지만, 실제로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발리 남부의 일부 지역이다..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리는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 발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발리섬 안에서도 각 지역별로 특색이 있어 다양한 여행객들의 취향을 충족시켜 준다..
최고급 호텔부터 저가형 숙소까지, 저렴하고 맛있는 길거리 음식부터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여행객들의 목적과 상황에 맞는 여행이 가능하다..
한편 발리는 한국의 여행사 직원이 뽑은 최고의 허니문 여행지로도 선정될 만큼 한국에도 잘 알려진 신혼 여행지이기도 하다.
특히 해질녘 펼쳐지는 태양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실루엣을 이루는 일몰의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선사한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편이며,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 자료나 시설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
처음 발리에 오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역사
- 선사시대
기원전 2000년경에는 대만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1 세기경부터 교역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동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리 북(銅鼓)이 발견되는 등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명이 시작하고 있었다.
4 세기에 들어서면서 힌두교에 속하는 자바 사람들이 건너와 살게되었고, 힌두 자바 시대를 맞아 그 초기부터 자바 왕의 지배 하에 발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913년 무렵에, 드디어 스리 케사리 와르마데와(Sri Kesari Warmadewa)를 통해 자신의 와르마데와 왕조가 세워졌다고 한다.
- 자바왕조(11~16세기)
1342년,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에 침입을 받아 400년 가까이 계속된 와르마데와 왕조는 종말을 맞는다. 마자파힛 왕국, 쿠디리 왕국의 후예 무프 크레스나 쿠파키산의 넷째 아들 스리 쿠트트 크레스나 쿠파키산을 보내 젤젤 왕국을 건설하게 했다. 그래서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의 간접적인 지배 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마쟈파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의해 쇠망하면서, 왕국의 신하들,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에 피난을 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에 의해서 고전 문학이나 그림자극, 음악이나 조각 등 힌두 자바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꽃 피었다. 또,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의 고승 ‘댄 할 니라르타’가 따나롯 해상사원이나 울루와뚜 사원 등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는 등, 종교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 군웅할거 시대(17~19세기)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세력의 진출이 시작되었지만, 별다른 특산품 없었던 발리는 식민지 통치의 관심지역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왕족 지배에 의한 자치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참고로, 발리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은 1597년 네덜란드 상선 대원이었다).
-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발리 르네상스
19세기 말이 되면서 당시의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의 유행 아래서 네덜란드가 발리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각 지역의 왕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먼저 1846년 발리 쪽의 난파선을 끌어올린다는 요청을 빌미로, 발리 동북에 군대를 상륙시켜 부레렝(Buleleng)과 젬브라나(Jembrana)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침공을 진행하여,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고, 발리 전체를 식민지화 시켰다. 그러나 이때 발리 왕족, 귀족들이 보였주었던 ‘뿌뿌딴’ Puputan, 무저항 대량 자결 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이 전통 문화 보호 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917년 발리섬 남부 지진 이후에 닥친 재앙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부상자는 1000명을 넘었고, 다음 해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독감이 발리에도 퍼졌으며, 1919년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 하였다. 이런 역경을 두고 당시 발리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들에 대한 의례를 다하지 않았던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의 행진’과 ‘상향 드다리’(Sanghyang Dedari, 빙의 무용)가 성행하게 되고, 주술적인 의례, 놀이 활동이 발리에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현상을 네덜란드 사람들은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재해 복구와 함께 보호를 진행한 것이다. 특히 부흥 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던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진정한 전통 문화의 존재를 믿고, 지진 이전 발리가 중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러한 "실수"를 부흥의 과정에서 배제하려하였지만, 결국 그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위와 같은 네덜란드의 문화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반신 누드 부녀" 그림과 함께 서양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의 발리 사진 컬렉션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1924년 바타비아 - 시가라쟈 간의 정기선 취항이 시작되었다). 1932년에 발리를 방문한 찰리 채플린은 "발리 행을 결정한 것은 형 시드니였다. 이 섬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미치고 있지 않고, 섬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자아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전의 관광객 수는 1920년대에는 연간 1,200 - 3,000명 정도였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통계도 볼 수 있다.
예술의 마을 우붓이렇게 서양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 (가믈란 등), 무용 (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중심에 있던 것은 우붓의 영주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 초대받은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Walter Spies)이다. 그의 집으로 멕시코의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Miguel Covarrubias)나 캐나다의 음악 연구가 콜린 맥피(Colin McPhee), 인류 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오스트리아 작가 비키이 바움(Vicki Baum) 등이 모였다. 그들은 대체로 "진정한 발리"를 지향하여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계급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각 지역의 왕족을 통한 간접 지배를 하였다. 관개 도로 등 농업 시설을 정리하고, 아편이나 커피 등의 상업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풍속을 개혁하여 나신을 금지시키는 등 유럽적인 근대화 정책도 실시했다. 또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가 강조되는 반면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등 평민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줄어들어 "평등한 촌락 사회"라는 특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였다. 네덜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에 거의 피해없이 발리 해전에서 승리했고 불과 20일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반겼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현지인들의 징발로 인해 불만이 증폭되었다. 그 당시 육군 장교였던 구스티 웅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 1944년 중반에 자바와 연계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고,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다. 민족 단합의 기운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하자, 네덜란드는 빠르게 발리로 돌아왔다. 1945년 8월 17일, 자카르타에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순다 국가"로 발리에서는 친공화국 파에 의한 통치 체제의 확립이 기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구체제의 붕괴가 진행되지 않고, 1946년 3월 다시 네덜란드가 상륙을 하자, 친공화국 파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네덜란드가 상륙하자 격렬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절정에 달했던 1946년 11월 20일, 발리 서쪽 마루가에서, 구스티 웅우라 라이 중령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가 이끌었던 게릴라 부대도 전멸했다(그러나 그 이름은 오늘날 발리 관문인 응우라라이 공항(덴파사 국제공항 현지 정식 명칭)에 남게 되었다. 또한 이때는 본국에 귀국하지 못하고, 잔류하였던 일본군도 가세하였다. 이들 중에는 학도병으로 징병된 조선인 "양칠성"도 있었으며, 그는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의 가릇 영웅묘지에 독립영웅으로 안장되었다.
이 게릴라전을 진압한 네덜란드는 1946년 12월 발리를 네덜란드가 직접 다스리는 "동인도네시아 국가"에 귀속, 자치령으로 선언하고 구체제를 이용한 네덜란드 의한 간접 통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의 항쟁은 이어져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 이양을 한 후 공화국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1950년 독립을 성취하였다. 결국 발리는 공화국으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수카르노 시대의 발리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고,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적인 대립이 지역 사회에까지 이르렀다. 1965년의 9월 30일 사건을 발단으로 공산당 토벌하였고, 일설에 의하면 발리에서만 10만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수하르토 정권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들어가면서 발리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의 세심한 배려의 하에 외화 획득을 목표로 하는 관광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3년 일본에서 받은 전쟁배상금으로 사누르 발리 비치 호텔이 건설되었고, 1966년 개장을 하게 되었다. 1967년에 응우라 라이 공항이 개항하면 사누르가 발리에 매스 투어리즘의 첫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누르와 꾸타는 비계획적인 개발이 진행되어 인프라 면에서도 큰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자카르타 중앙 정부는 새로운 누사두아 패키지 형식의 고급 리조트로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오일 쇼크 등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고, 1983년에 불과 450개의 객실로 누사두아 해변이 개장되었다. 그런데 누사두아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선 리조트로 발전해 간다.
이렇게 발리의 관광 개발은 오랫동안 중앙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고, 관광 관련 세수의 대부분을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 같은 중앙 정부 주도의 "만들어진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전통 가치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획일적인 이미지와 관광 마인드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교묘하게 단련해 간다.
* 종교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발리 섬에는 3,151,162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이슬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리 섬 사람의 92%는 지역화된 힌두교인 발리 힌두교를 믿는다. 그 뒤로는 이슬람교(5.7%), 기독교(1.4%), 불교(0.6%) 순이다.(2003년 통계)
"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리에서는 사람의 약 90%가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에 의해 성립된 발리 힌두교를 신앙으로 받들고 있다. 발리 전통 마을 (데사, 아닷트)에서는 토지와 조상신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데사 아닷트 위치를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방지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습(아닷트)도 꽤 짙게 남아 있어 상점이나 집 앞에는 매일 아침 챠난이라는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시간이 보내고 있다. 따라서 매일 발리 섬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발리 사람들은 축제에 대해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발리 사람들에게 축제(우파차라)는 어디까지나 이상과 같은 종교 의식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리 사람들은 매우 영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발리 힌두교의 세계관은 방향에 따라 지행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카쟈"(산쪽)와 "쿠롯도"(바다쪽)의 조합이다. 카쟈과 쿠롯도 대비는 위와 아래, 우세와 열세,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상징적인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원의 위치와 장례식 장소, 저택의 구조 등이 대비 따라 정해져 있다. 또한 질서관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지거나,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이나, 왼손으로 돈을 취급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이렇게 발리는 발리 힌두교의 교리에 뿌리를 둔 세계를 추구하고 있지만, 1990년대 이후 자바섬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 산업에 종사할 목적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무슬림이 급증하고 있다.
* 문화
섬 남부를 중심으로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발리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침, 저녁 각각 2,3 시간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창작 활동에 종사하여, 미술,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리 섬은 공연 예술, 그림, 조각 등 예술로 유명해졌다.
발리의 예술은 오래 전부터 인도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세대를 거치면서, 발리 고유의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인도의 흔적이 짙게 남은 유물로 페즐에서 출토된 점토로 만든 봉납판(8세기)에는 인도 팔라 제국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불교 삼존 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인도 힌두교의 석조인 두르가 상(11 세기 무렵)도 걸작으로 꼽힌다.
다만, 오늘의 발리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은 관광객을 위한 예능과 미술로, 1920년대 이후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이후의 역사 속에서 발리를 방문한 유럽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예능은, 당시의 유럽인에 의해서, 또는 전후의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관광객에 의해서, 발리의 '전통 문화'로 상징화 되어 관광 공연이 발리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수하르트 체제 붕괴 후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지역 자치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인도네시아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발리에서는 지역 문화 진흥을 목표로 삼고, 발리 포스트를 중심으로 ‘발리 TV’가 만들어지는 등 아제그 발리 운동이 일어났다.
발리여행은 아이러브발리